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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실패가 두려우면 아무것도할 수 없다.... 유희태. 前 중소기업은행 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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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츠선데이 2014. 10. 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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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동산 유대표 부부사진

 

나 은행 그만두면 안 될까?

갑작스러운 내 말에 아내는 내가 은행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모른다고 타박했다.

 

 당신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사람이에요. 요즘 같은 세상에 은행이 얼마나 좋은 직장인데 그만두려고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서 그래.

 이후 어느 날 그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유희태!  1953년 전북완주에서 7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1학년 때 인문계고등학교를 지원했다가 중학교3학년 때 상업학교로 진로변경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마치고 상고를 가기위해 집을 떠나 전주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는 400원의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회고에서 그는“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절, 등록금 낼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받은 장학금 400원의 가치는 지금의 몇 억 원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400원은 내게는 꿈과 희망이자 미래였다. 그 장학금이 장래에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당시 후원자나 학교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내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가정형편은 아버지가 농협조합장을 11년을 하셨음에도 아주 가난했다. 비료대금으로 빚을 진 사람들의 보증을 서주시다 재산을 모두 날렸기 때문이다.

 

 그는 상고졸업을 앞두고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직장에 취직하기로 맘먹고 은행입행시험을 치른다. 그리고 지원자 300명중 13명 합격자발표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누군가 재정보증을 해줘야 취직이 되는 위기에서 첫 신세를 지게 된다.

 

그를 도와준  아니 그의 취직의 반을 도와준 인물은  당시 지역 국회의원이신 유기정 의원 이다.  *참고 (유기정 의원은 중소기업중앙회 회장과 삼화출판사 회장을 엮임 하셨다)

 이렇듯 어렵게 입사한 은행에서 그의 젊은 시절은 시작됐다.

 

  그는 은행에 입사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렇다고 그냥 잘나간 것은 아니다. 남들보다 몇 배 아니 몇십배 노력과 자기희생을 감수했다.

 그는 은행입사 후 약관의 29세에 기업은행 노조위원장(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 겸임)에 선출됐다.

 

 이후 1995년엔 공모 지점장 1호로 뽑혔으며 9년간 서울과 경기도 내 부임하는 지점마다 “기업은행을 대상으로 한 영업실적 평가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집념과 열정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덕분에 ‘1등 제조기’란 별명도 이때 붙었다. 신설 지점이나 실적이 저조한 지점을 맡아도 1등으로 키워내니 해당 지역의 타행 지점장들에겐 미안한 감도 많았다 한다.

 

 유희태는 이후 본부장을 거쳐 2007년 1월엔 기업은행 부행장 자리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고졸 학력에 노조위원장 출신이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의 부행장으로 승진한 일은 전례가 없던 일이였다.

 이후 은행권 최고의“영업귀재”이던 그는 2009년 1월 첫 직장이며 젊은 시절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정든 기업은행을 퇴직했다.

 

 * 고향 완주에 민들레 동산을 만들다...

 

그리고 평소 생각대로 고향인 완주로 내려와 그 해 9월 비영리 봉사단체를 창립하고 ‘민들레포럼’이란 단체를 설립했다.

 민들레처럼 살아온 본인의 인생처럼 지역사회에 봉사와 희망의 홀씨를 뿌리기 위해서다. 또 그가 살아가며 실천하는 나눔의 가치일 것이다.

 유희태 대표는 같은 해 10월엔 비봉면 천호로 1만여 평의 부지에 민들레를 심고 영농조합법인 ‘민들레동산’도 조성했다.  이곳 민들레동산 자리도 그 옛날 세종대왕이 선조인 유습 장군에게 하사한 땅의 일부다.

 이쯤에서 유희태 대표의 가족사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가족사를 보면, 유희태 대표는 조선 세종 때 이종무 장군을 보좌해 대마도를 정벌한 고흥 유씨 중시조 유습 장군의 20대 손 이다.  특히 한 집안에서 9인의 항일의사를 배출한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 가문의 후손인 것이다.

 그의 선조부 9명(류현석, 류치복, 류준석, 류영석, 류태석, 류명석, 류연풍, 류연청, 류연봉)이 독립운동가로 활동 했다.

 

 일문 구의사(一門 九義士)라 부르는 선조부들은 1905년 맺어진 을사늑약에 분개한 류치복선생과 함께 행동했다. 류치복 선생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각처에서 봉기하는 의병들과 같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신명을 다할 것을 결심하고 지역에 거주하는 유지명 송태식 등과 결의, 친족 8인 등과 더불어 1907년에 의병을 조직해 활동했다.

 이후 일본헌병한테 붙잡혀 류치복선생은 즉결 처형을 당했고, 나머지 8인은 옥사하거나 옥고를 치른 후 형독으로 사망했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유희태 대표가 지역 원로, 마을 노인들의 증언 등 자료를 수집해 공적서를 제출하는 등 현창사업을 벌여 1983년 국가에서 공훈을 인정을 받았다. 1983년에는 그 공훈을 인정받아 대통령이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가정사에서 보듯 유희태 대표는 책임감과 봉사정신이 남다르다. “내가 살아온 길,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나눔의 삶이라고 얘기하고 싶다“라고 말한 그가 지금도 사랑과 나눔의 가치를 확산하고 싶어 하는 진짜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그것은 고교 시절 400원이 동기가 되어 “취업한 뒤 여건이 되면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반드시 돕겠다.” 라고 결심했던 다짐을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 나눔과 봉사의  민들레홀씨를 뿌리다...

 

유대표와 장학금 수급학생

 

그는 이미 오래전 홀트아동복지에서 4년7개월 된 여자 쌍둥이를 입양해 함께 살고 있으며 “주희복지재단” 이라는 명칭으로 25년 전부터 저축해오던 금액이 3억이 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설립한 “민들레포럼”에서 학업성적이 우수하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학생을 매년 선발하여 민들레홀씨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벌써 5년째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그 인원만 해도 110명이 됐다.

 

  특히 2014년 올해는 그 인원도 확대해 50명을 지난10월12일 민들레동산 메인 홀에서 지역의 많은 인사들과 민들레포럼 회원 등 이 참석해 성대히 치렀다.

 이날 장학금 수여식에는 민들레포럼창립 5주년 기념식을 겸 했으며 민들레홀시 장학금 수여식에 박성일 완주군수, 이병렬 민들레포럼이사장, 최원철 전주대부총장, 및 장학금수여학생부모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날 유희태 대표는 인사말에서 “아직도 희망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많은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며 “우리는 눈과 귀를 열고 희망의 홀씨가 필요한 곳을 찾아 조용히 희망홀씨를 꽃피워 새로운 기적을 만들자”고 밝혔다.

 

 민들레는 홀씨를 날려 어떤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가 이곳 고향에 일궈놓은 “민들레 동산”과 “민들레포럼”이 그의 어릴 적 다짐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장학생들이 나라의 큰 거목으로 성장해 또다른 민들레홀씨를 뿌릴 때 까지 이들의 대부로 거듭나시길 기대해본다.

특별취재/이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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