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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칼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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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포츠선데이 2014. 10. 25.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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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이유가 남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글 쓰는 사람은 남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본격적인 글쓰기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우선 사해(思海) 라는호를 지었다. 생각하는 바다 - 부산에서 나고 부산에서 자라 매일 바다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다같이 넓고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노트에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경을 처음 썼을 때, ‘갑자기 사물이 0.1미리 짧아졌다. 이젠 나는 영원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는 등의 얘기였다. 내가 그 때 왜 글쓰기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내가 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노트는 나의 최초의 습작노트였던 것이다.
자기 글을 가장 열심히 읽는 독자는 쓰는 이 자신이 아닐까? 몇 번을 고쳐 쓰다 보면 수없이 여러 번 자기가 쓴 글을 읽게 된다. 글쓰기가 고조에 오를 땐 자기 글 이외에 다른 글은 별로 읽을 시간도 없다. 자기가 쓴 글만을 읽는 게 나의 지적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의문이 될 때도 있다. 어쨌든 자꾸 고치다 보면 글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이만하면 꽤 잘 쓴 것 같은데 내 글을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궁금한 생각이 든다. 이 때 친구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우정을 앞세워 내가 쓴 글을 읽어 보라고 수줍게 내밀게 된다. 친구들이 ‘야, 정말 잘 썼다’고 경탄 해줄 것을 기대하며. 친구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지만 이 우정의 친구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 글의 열렬한 독자이며 비판자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어른이 되어서도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들이 읽었던 내 초고가 우리가 만날 때 좋은 화제거리가 되었음은 긍정적인 효과이기도 했다. 그들의 논평 덕분에 그 초고는 더욱 풍성해 졌다는 것은 그들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생애에 가장 지독한 글쓰기는 습작기간에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작가들에겐 밤을 꼬박 세우며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불태우며 자신의 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 있었다. 내가 과연 재능이 있을까를 회의하며, 꽉 막힌 글을 놓고 절망에 몸부림 치던 그 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소설을 보면, 무명의 작가가 처음 만난 지하철 집표원에게 자기 소설의 구상을 설명하고 2시간 동안 소설을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과연 주인공을 죽여야 하는지, 살려야 하는지 하는 문제였다. 그는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했고 누군가와 그 문제를 토론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철 역에서 표를 받는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 가련한 집표원은 미친 사내의 열렬한 얘기를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명작가는 마침내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글은 쓰는 것은 생각 한다는 것이다. 나는 길을 걸으며 생각을 많이 한다. 잠들기 전에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때의 생각은 아주 단편적인 경우가 많고 구체적으로 잘 진전되지 않는다. 펜을 잡아 쓰기 시작해야만 생각이 구체화되고 줄거리가 만들어 진다. 산책을 하며 생각에 몰두할 때 내가 추구하는 것은 섬광 같은 아이디어 혹은 한편의 영상이다. 머리를 텅 비우고 캄캄한 밤에 성냥불을 키듯 아이디어 혹은 영상이 떠 오르기를 기다리며 여러 생각의 줄기들을 더듬고 만지는 것이다. 결국 섬광이 번쩍! 하지만 산책 중에 이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내용을 계속 추구하는 것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내 방의 문을 잠그고 컴퓨터의 활자판을 두드려야만 비로소 아이디어가 구체화 되어 나간다. 글은 노동이다. 글은 천재의 번쩍임으로 갑자기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썼다 지우고 고치고 만들어 가는 노작의 결과이다. 노동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글은 위장으로 쓰는 것이다.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가며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자 한 자 하나도 빼지 않고, 차근차근, 비약 없이, 독자가 이건 알고 있겠지 하고 미리 가정하지 말고, 어린애에게 의미를 설명하듯, 한 문장에는 한 개의 생각만 담고, 한 문장에 절대 두 개 이상의 생각을 담지 말고, 빼곡하게 쓰는 것이다.


글은 고독하다. 말을 할 때는 듣는 이의 눈을 보며 한다. 듣는 이의 눈이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다시 이해가 될 때까지 설명할 수 있다. 듣는 이의 바디 랭기지가 아니라고, 동의하지 못한다고 하면 말을 바꿀 수도 있다. 듣는 이들이 좋다고 하면 신바람을 내며 거품을 튀길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은 독자와 상호작용이 단절되어 있다. 글은 활자화 되어 차갑게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독자들이 그 글을 오해해도 바로 잡을 길이 없다. 그 글에 대한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작가는 무력하다. 글은 폭군적이다. 쓰여져 있는 글은 수정할 수 없다. 이제 내 생각이 바꿨다고 변명할 수도 없다. 오해된 글은 오해된 채로 그기에 서 있다.

글은 밋밋하다. 말에는 억양이 있다. 속삭이기도 하고 고성을 지를 수도 있다. 글에는 소리도 강약도 없다. 글에 억양과 강약과 속삭임과 고성을 넣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다. 묘사하는 대상을 그대로 내밀면 안 된다. 대상을 끌어 올려야 한다. 하늘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 대상은 더욱 고양되고, 주어진 현재를 뛰어 넘고, 이상화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그렇게 된 후에야 글을 써야 한다. 이렇게 쓴 글은 또 뜸을 들여야 한다. 솥에 귀를 대고 밥이 잘 익어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지를 잘 들어야 한다. 밥에 깊은 맛이 들어야 한다. 씹을 때 푸석하지 않고 쫄깃 쫄깃 감칠 맛이 나야 한다. 글이란 밥상은 이렇게 차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지만 글을 쓰는 행위만이 내가 진실하게 살아가는 단 하나의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글을 쓰는가? 삶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삶의 진실은 문학과 철학의 오랜 노력에 의해 하나씩 밝혀져 왔다. 이제 그 진실은 거의 밝혀진 것 같다. 마지막 한번의 노력으로 삶의 진실이 밝혀 진다면, 그 때 나의 글쓰기도 끝날 것이다. 그날까지 나의 언어로 말하겠다. 나만의 언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나의 언어로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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